연화호의 밤 깊은 밤이 내려앉은 호수에 나룻배 한 척이 표표히 흘러갔다. 어둠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새하얀 장포를 입은 남자는 단정한 몸가짐으로 노를 젓고, 밤하늘처럼 새카만 중의만 대충 걸쳐 입은 남자는 방탕한 자세로 맞은편에 앉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흑의의 남자, 위무선이 한 쪽 팔을 밖으로 늘어뜨려 유연하게 갈라지는 물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한여...
속절없이 무저갱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가속도가 붙은 몸은 끝도 없이 아래로 또 아래로 재빠르게 추락했다. 양팔을 허우적거려보아도 손아귀에 지푸라기 하나 잡히는 게 없었다. 목청을 높여 소리쳤으나 성대가 꽉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크게 뜨여진 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커먼 사기가 얽히고 설켜 꿈틀거리는 광활한 하늘 뿐이었다. 무수한...
얼어붙은 나뭇가지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휘파람같은 바람에 쓸려 흩어졌다. 열린 창 밖으로 한쪽 팔을 길게 뻗은 위무선의 손바닥 위에 눈송이가 팔랑거리며 내려앉았다. 아주 잠시 형태를 유지하다 곧 체온에 녹아 사라진다. 다시 눈이 내리는 것 같네, 하고 중얼거린 위무선이 물기가 남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혈색이 없는 얼굴엔 가시지 않은 병색이 완연...
둘둘 말린 이불 끄트머리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같았다. 뾰족하지만 그러쥐면 부드럽게 손가락에 휘어 감기는, 그 주인을 꼭 닮은 가시. 톡 튀어나온 가시가 앞뒤로 또 좌우로 느릿느릿 흔들렸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맞는데 재가동 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아마도 오늘 아침 기온이 평소보다 훨씬 더 낮아서일 거라고, 엘리엇은 생각했...
닿는 순간, 살갗이 벗겨질 것 같은 뜨거움이 느껴졌다. 잘게 다진 유리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리는 모래 위로 한 발을 내디뎠던 리오우가 흠칫 놀라며 뻗었던 다리를 다시 그늘로 원복 시켰다. 자신도 모르게 앗 뜨거- 하는 혼잣말이 튀어나온 바람에 앞서 햇살 아래로 걸어나갔던 스오가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금빛 눈동자에 의아함을 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오의 ...
지겹다. 위스키잔을 손 안에서 의미 없이 굴리며 성훈은 생각했다. 성훈의 한 팔을 감싸쥔 채 바싹 붙어 앉은 여자에게서 짙은 향수냄새가 풍겼다. 콧소리를 섞어 뭐라고 종알거린 것 같은데 주위가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사실 전혀 듣고 싶지도 않았다.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 저 쯤에서 경박스런 웃음소리와 숨 넘어가는 여자의 헐떡임이 함께 터져나왔다. 반대편...
병원에 있으면 항상 그랬다. 시도 때도 없이 무거운 잠이 폭력적으로 쏟아졌다. 이렇게 자는데도 밤이 되면 또 잘 수 있는 스스로를 참 대단하다 느끼며 나오토는 낮잠에서 막 깨어나 나른한 두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이제 익숙해진 병원 천장의 규칙적인 무늬가 점차 또렷해지는 것과 동시에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들기 전보다 몸이 훨씬 가벼웠다. 오늘 아침...
아사이 마모루의 시선은 한참 전부터 한 곳에 꽂힌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아노 페달을 밟을 때 마다 밀려 올라가는 슬랙스 자락 아래로 드러난 동그란 복사뼈. 옅은 핑크색으로 물든 복사뼈 위로 가느다랗게 올라붙은 종아리뼈. 발의 움직임을 따라 오르내리는 탄력적인 근육. 저 새하얗게 빛나는 발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얼마나 흡족한 기분이 드는지...
창문을 열자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유마의 뺨을 훑었다. 적당히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기분 좋았다. 지긋지긋하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던 여름이 드디어 물러나고 비로소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출근길에 목을 옥죄던 갑갑한 넥타이도 적당히 핏되는 슈트도 알맞게 즐길 수 있는 계절이 되었다. 오늘은 어떤 슈트와 넥타이를 매치할까, 매일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하며 길게...
거리는 온갖 불빛들로 반짝거리고 곳곳이 빨강과 초록으로 장식되어 알록달록했다.저마다 잔뜩 멋을 부린 채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길목을 가득 채운 인파를 조금 질린 듯한 눈으로 응시하던 성훈이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시간으로부터 5분 정도 경과했다. 평소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데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하는 걱정이 불쑥 튀...
물살을 헤치는 소리가 후끈한 밤공기를 시원하게 갈랐다. 보기 좋게 그을린 다갈색 등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수영장을 비추는 조명 아래에서 미끈한 돌고래처럼 반짝였다. 거리낌없이 쭉쭉 치고 나가다가 유연하게 턴, 그리고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온다. 지치지도 않고 레인을 왕복하는 스즈키를 턱을 괸 채 지켜보던 료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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